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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마귀의 간계

귀신에게 억압받는 범위/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악의 유혹과 시험에 부딪치고 있으며 때로는 마귀의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엡 6:10-18), 바울과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악한 마귀의 흉계를 경계하고 대적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벧전 5:8, 약 4:7, 요한일서 4:1).  루이스 벌콥은『교의학』에서 타락한 천사들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둠의 세력들인 타락한 천사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싸우며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끊임없이 반항하며 선택된 사람들을 눈을 멀게 하고 그릇 인도하려고 하며 또한 죄인들을 자극하여 악을 행하게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관적인 편집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흘러야 하지만 문제는 악의 세력들이 우리의 길을 가로 막을 때 우리는 그 귀신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에 로이드 존스는『귀신들림, 점술, 강신술』에서 “성경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귀신들림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시달리거나 공격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 경멸적인 어투로 던지는 질문인데 여기서 '사로잡히다'라는 말은 고통당하는 자를 귀신이 꼼짝달싹 못하게 완전히 차지해 버린다는 뜻으로 귀신은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을 억압하거나 고통에 처하게 공격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속박에 처한 신자를 귀신에게 사로잡혔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귀신이 들릴 수는 있어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C. Fred Dickason는 믿는 자의 귀신들린 상태에 관하여『Demon Possession and the Christian』에서 건실한 이론을 전개합니다.  “‘다이모니조메노스’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상태가 아니라 단순히 마귀가 ‘들린’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마귀가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다양한 차원의 지배를 통해 다양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로잡힘이라는 개념은 신약의 용어나 그 용례와는 거리가 멀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에게 혼동과 정서적인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라는 말보다는 '귀신들리다'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억압과 속박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들리다'(have)라는 말을 고려해 볼 때 집에 방문객 특히 달갑지 않는 사람을 '맞아들일' 경우와 혹은 집에 쥐 한 마리가 '들어와 있다'거나 의복에 벼룩이 '들어와 있다'고 할 때 여기서 '맞아들이다'라는 말과 '들어와 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불청객이나 쥐, 벼룩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귀찮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들로 인해 짜증이 날 것이며 형편이 닿는 대로 집이나 의복에서 제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달갑지 않는 불청객인 귀신들의 방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욥 1:7).  예를 들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인 베드로는 자신이 사단에게 이용당했던 것을 체험으로 깨닫고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히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물론 베드로가 그 순간에 사단의 도구가 되었다고 해서 귀신들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단은 끝까지 가룟유다처럼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요 13:2, 마 27:5, 행 1:25), 베드로를 청구하려고 애썼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눅 22:31-32).

 

이렇게 성령과 악령이 결코 한 사람 안에 함께 거할 수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신자가 귀신 들릴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마귀가 거주할 수 있는 발판만 마련되면 얼마든지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영'과 '혼'과 '몸'사이의 차이점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영'을 뜻하는 신약적 단어는 “프뉴마”로 육적인 것, 즉 혼과 대조해 볼 때 영은 거룩한 것들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가진 부분인(고전 2:14), 반면에 '혼'을 뜻하는 단어는 '프슈케'로 이 단어는 생명 그 자체, 즉 감정과 지성과 의지를 정의하고 있는데(살전 5:23), 성경에서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은 허물과 죄악 가운데 죽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엡 2:1).  그러나 이런 사람도 육체적으로는 죽지 않고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엡 4:18).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으면(엡 2:8), 죽었던 영이 소생되어지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데(롬 6:4),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영에 들어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가져다주셨기 때문입니다(요일 5:11-12).

 

이것으로 볼 때 죄로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에 성령은 우리의 '영'속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고전 12:3), 쉽게 말하면 자연인의 상태의 인격은 속사람과 구별되며(히 4:12), 영으로 거듭난 자는 구원을 얻어 주의 자녀가 되었지만(요 3:6), 그와 동시에 인격의 일정 영역은 특정 죄에 의해 귀신에게 속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바울은 신자의 육체를 '성령의 전'이라 가르쳤고(고전 3:16), 여기서 '인간의 육체'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나 접근할 수 있으며 영적으로 오염될 수 있는 성전의 바깥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고(막 11:15-17), “인간의 혼”은 성결한 제사장이 접근할 수 있는 성소에 해당될 수 있으며(히 9:6), '인간의 영'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접근할 수 있는 지성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히 9:7).  만약 제사장의 삶 가운데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을 경우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듯이(레 10장), 죄도, 사단도 전능하신 그분의 거룩함으로 충만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고(민 18장), 영원한 구속을 위해 성별된 '영'은(요 5:24), 여전히 타락의 가능성을 지닌 '혼'과 '몸'과 구별되며(살전 5:23), 비록 우리가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완전히 성화되지 못한 신자이기에 죄에 속박되거나 부분적으로 귀신들릴 가능성(억압이나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24절 말씀과 바울이 말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처럼(빌 2:12),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영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아직 혼과 육체가 자유를 얻을 때까지 원수의 간섭으로부터 해방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칼빈 역시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영혼에 대해서는 사단이 그 어떤 권세도 행사하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말하는데 쉽게 요약하면 우리의 “영”의 중앙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점유될 수 있는 반면에 바깥 부분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요일 2:16), 아직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정복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주권 하에 온전히 항복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기에 바울도 우리의 고통스런 상황을 ‘내가 원하는 선을 행치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말했듯이(롬 7:19-20), 죄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기에 우리에게서 행동의 자유를 빼앗아 간다면 악한 영이 또한 우리 자신의 한구석에 얼마든지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