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lobal Focus >체감온도 65도 · 알프스도 열대夜.. "사탄 '루시퍼'가 왔다"
박세희 기자 입력 2017.08.11. 11:30 수정 2017.08.11. 12:00댓글 7
폭염과 사투 벌이는 유럽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디자인 회사에 근무하는 호세 로드리게스(29) 씨는 지난 9일 평소처럼 길을 걷다 쓰러질 뻔했다.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됐고 눈앞은 아득해져 다리가 휘청였다. 고열에 의한 탈진이었다. 그는 “이번 폭염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며 “한낮의 땡볕이 내리쬐는 길을 걸을 때면 살갗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라고 전했다. 11일 외신들에 따르면 지금 유럽은 ‘루시퍼(Lucifer)’라 불리는 폭염과 싸우고 있다. 유럽 일부 지역의 기온이 40도를 넘나들면서 이 무더위를 놓고 유럽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탄, 지옥의 왕을 뜻하는 ‘루시퍼’라는 별칭을 붙였다.
상황은 심각하다.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에선 체감온도가 63도에 이른다. 지난주 루마니아의 한 45세 남성은 밭에서 일하다 숨졌고 60세 남성은 길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했다.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알프스에서는 열대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해발고도 1500m의 밤 기온이 20도를 넘어섰다.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면서 물고기가 폐사에 이르는 일도 있다. 세르비아 남부에서는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철로가 휘면서 열차 운행이 지연되기도 했다.
폭염과 가뭄 등의 원인은 정확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지구 온난화가 영향을 미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세계기상협회는 “지구 온난화가 남유럽이 폭염과 가뭄에 시달릴 가능성을 10배가량 높였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모두 알면서도 간과했다면 이제는 정말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매년 여름이 점차 더워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제임스 한센 컬럼비아대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51∼1980년 동안 북반구 여름의 3분의 1은 ‘정상(Normal)’ 범위의 기온이었다. 하지만 이후 2005∼2015년 사이 3분의 2가 ‘뜨거운(Hot)’ 범위에 속했고 15%는 ‘매우 뜨거운(Very hot)’ 범위에 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구 온난화와 가뭄, 무더위는 생태계와 인간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탈리아는 6월부터 기온이 40도를 웃돌고 있으며 강수량은 평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폭염에 비까지 안 오니 올리브 등 열매들의 생산량이 급감했다. 국제올리브유위원회는 최근 “올리브 생산이 지난해보다 50% 감소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올 들어 지속되고 있는 폭염과 가뭄은 벌들에게도 큰 타격을 입혔다. 이는 꿀 생산이 급감할 뿐 아니라 벌의 화분 매개를 통한 식물들의 정상적 생육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농민단체인 콜디레티는 “혹독한 날씨로 올해의 꿀 생산이 작년의 절반 수준인 1만 t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콜디레티는 계속되는 폭염과 가뭄으로 포도주, 올리브, 토마토 등 이탈리아 대표 작물과 유제품 생산량 역시 크게 줄어 농축산 분야에서 올해 최소 20억 유로(약 2조6816억 원)의 피해가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 각국 정부는 기온이 40도를 웃돌 경우 업무를 중단하고 외출과 음주를 자제하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세르비아 보건 당국은 “창문에 젖은 수건을 걸어두고 물을 많이 마시라”는 구체적인 지침까지 내놨다. 매년 여름 남유럽을 강타하는 무더위가 새로운 소식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처럼 수일간 계속되는 폭염과 가뭄 등은 일반적 현상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극단적 기후 변화는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있다. 인도에선 폭염과 가뭄이 계속되며 농작물 생산이 어려워져 농민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과 코르시카 섬에선 큰 산불이 나 나무들을 태웠다. 바티칸의 분수대도 잠그게 한 최악의 가뭄도 있는 한편, 아시아에선 물폭탄처럼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고 무더위에 갑자기 우박이 쏟아져 내린 곳도 있다.
문제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다. 오는 2100년에는 인류의 4분의 3이 폭염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카밀로 모라 하와이대 교수팀이 최근 학술지 자연기후변화(NCC)에 발표한 논문에서 “사람 몸의 체온조절 능력을 뛰어넘는 ‘치명적 기온’에 1년에 20일 이상 노출되는 인구가 현재에도 인류 전체의 30%에 이르며 온난화를 이대로 방치하면 오는 2100년엔 74%까지 치솟아 전 세계 인구 4분의 3이 폭염으로 죽음의 위협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올해 기준으로 지구인구를 65억 명이라고 한다면 48억7500만 명이 더위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인류는 위기를 탈출할 방법을 강구하겠지만 이 같은 연구결과는 유럽인들이 폭염에 루시퍼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에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한다. 사탄과 하나님의 마지막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인 아마겟돈의 대환란이 바로 더위와 함께 온다는 것이다. 모라 교수는 “지난 2003년 폭염으로 유럽에서만 약 7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9·11 테러 당시 사망자 수의 20배 이상에 달하는 규모”라면서 “인류는 에어컨을 튼 실내에 갇힌 죄수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류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 아래에 숨지만 에어컨을 가동하려면 화석연료가 필요하다는 점도 아이러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