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 핑크

아더 핑크의 거듭남 4

주와 복음을 위하여 2017. 1. 14. 15:41

 
3장 거듭남의 근원
 
 
● 거듭남은 전적인 누구의 역사인가?
 
거듭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첫 번째 출생 뿐 아니라 더욱 두 번째 출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이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 1장 13절에 명확히 설명되어 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이 구절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거듭남은 유전되거니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혈통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혈통으로는 이 초자연적인 출생을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 주님이 지상 사역을 하실 당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던 무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선한사람에게 나쁜 아들이 있는 경우도 많고,
아무리 나쁜 아버지에게도 선한 아들이 있을 수 있다.
 
이삭이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삭은 망령된 아들인 에서를 낳았다.
 
대제사장이었던 엘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었지만, 그의 아들들은 우상을 숭배했다.
반면에 악신이 내린 사울에게서 요나단이 태어났고,
또 이스라엘 역대의 왕중 가장 악했던 아몬은 경건한 요시아를 낳았다.
 
그러므로 구원은 유전되지 않는다.
계보나 혈통도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2. 거듭남은 죄인의 의지나 의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결심이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적인 의지작용이나 행위의 결과도 아니다.
 
어떠한 작용 없다면 물 스스로는 수면 위로 치솟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의지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을 향해 움직일 수 없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기에 조물주 되신 그분과 맞서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이러한 말씀으로 볼 때 거듭남은, 육신의 의지로 인한 결과물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인간의 "자유의지"는 치통을 치료하거나 상처 난 손가락을 낫게 할 수 없다.
그러한데, 자신의 병든 영혼을 치료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3. 거듭남은 설교자의 설득력의 결과물이 아니다.
 
현대의 일부 전도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회심자라고 자타하는 많은 사람들이 최면에서 생겨난 결과물일 염려가 다분히 있다.
설득과 압박으로 억지로 결정을 내리게 하는 시도는 아래의 말씀에 의해 확실히 거부되어야 한다.
 
거듭남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기 위해 탄원하는 것이 전도자의 일이지만,
내키지 않는 것을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다.
 
“사람이 말을 물가로 이끌어 갈 수는 있지만 장정 10명을 동원해도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라는
옛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
 
내키지 않아 하는 죄인을 자발적으로 구하도록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
또한 성령님의 역사이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시 110:3)
 
우리는 말씀을 전파하지만
그 결과는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4. 거듭남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거듭남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라면, 하나님 자신께서 이 일에 주인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은사를 주시며 그 주권적 의향에 따라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야고보서 1장 18절 말씀을 보자.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요한복음 1장 13절의 말씀에서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선포되었음에도
여전히 거듭남에 인간이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알미니안들은 거듭남이 신자의 의지와 성령님의 공동의 역사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Arminian)들은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 구원을 얻는데 인간의 행위 또한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만일 오직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죄인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대답할 것이다.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돌아온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리는 일이 하나님과 죄로 인해 죽은 죄인이 합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모순 논리의 죄를 범하고 있다.
 
그들의 말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이들에게 일정한 양의 도움을 베푸시고,
거듭난 이들은 그 "도움'을 잘 활용했기 때문에 거듭났다는 의미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인간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명백한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이 아니라 "생명'이다!
인간은 살리심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존재 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전에 죄인이 먼저 그리스도를 믿을 수는 없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또한 참으로 부질없는 질문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즉 사람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면에서는 너무나 활발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이것은 단어들을 바르게 정의하는 것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보여준다.

● 죄인은 어떠한 상태인가?
 
죄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살아있으나,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어있다.
 
죄인은 육체적인 생명과 정신적 생명, 그리고 도덕적인 생명은 소유했지만,
영적인 생명은 완전히 죽어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을 때,
진정 말씀하신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그 창조주께 불순종한 바로 그날, 그들은 죽었다.
육체적으로, 도덕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다.
 
그리고 각기 그 종류대로 종자를 내듯이
타락하고 영적으로 죽은 아담은 타락하고 영적으로 죽은 자손을 낳았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인류가 거듭나야만 하는 절대적인 이유인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영적인 활동에도 전적으로 무능하다.
 
그는 결코 경건한 생각을 할 수 없으며,
경건한 사랑을 품을 수도 없으며, 경건한 의지를 행사할 수도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섬기기 전에
반드시 먼저 거듭나야 하고, 거듭남을 통해서 경건한 성품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 태어난 아기가 자신의 하늘 부모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낳은 자식에게 자신의 팔에 편안히 눕는 방법을 가르치는 어미는 없다.
보호해주지 않으면 아무 도움이 없는 아기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신을 낳아준 어미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그 자신을 그리스도께 의지함으로서 거듭남에 대한 증거를 보이게 된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나야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원리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할 것이다.
그저 마음의 문을 열고, 그를 들어오시게 하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부터 나게 하시지 않으면, 즉 거듭나게 하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시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것이 거듭남을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
 
● 성경에서 구원의 순서란 무엇인가?
 
성경의 순서대로라면 먼저 거듭나고,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0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되어있다.
 
11절을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왜 12절에 언급된 사람들은
앞선 두 구절에 나온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그를 알지도 못했고 영접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들은 "그 이름을 믿는“ 자가 될 수 있었을까?
 
13절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유였다. 믿을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들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참된 믿음으로 믿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일한 진리가 요한복음 3장 36절에 설명되어 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그가 믿는다는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셨는데,
"듣고”와 "믿는"다는 것은 이미 마음 가운데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26절 말씀의 명령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순서를 바꾸고자 한다.
인간은 영적으로 살아나기 위해선 먼저 믿어야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믿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주님께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 바로 다음에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마치 모든 교계에서 이것을 거부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선포 앞에 무릎을 꿇도록 도전하고 계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슈로 삼아 논쟁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숭앙하는 것은 말세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 가운데 열성 있는 자들은 정통 신앙의 수호자로 숭앙을 받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반드시 거듭남에 앞서 일어나야 한다고 무지 가운데 가르치는 이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의 선입관과 편견이 이 주제에 대해 신중하게 연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도
다소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진리가 우리 앞에 명백하고 충만히 제시 되었고,
성경의 가르침을 그토록 자세히 밝혔음에도
어떻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이 진리를 부인하고 강력하게 이것을 반대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난해하고 모호한 성경의 한 부분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증거가 되는 구절 뒤에 증거가 되는 구절이 뒤따른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보다 더 명백한 말씀이 어디 있는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 거듭남에 대하여 누가 이끄셔야 하며 이끄신다는 뜻이 무엇인가?
 
어떠한 죄인도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전에 반드시 아버지께서 “이끄셔야"한다.
여기의 "이끄심"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 주님께서 다음 구절로 넘어가서 설명하심을 볼 수 있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하나님의 자녀, 이사야 54:13참조)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그리고 구주께서는 회피할 수 없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f:45)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께 “나아가기”전에
내면의 귀로 "들어야“ 하고(영생의 전제가 되는 필수적인 것이다),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
 
만일 죄인이 거듭나기 전에 회개하고 믿을 수 있다면,
그가 거듭나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자연인인 인간의 의지적인 행동에 의해서 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쓴 샘물이 단물을 내고, 썩은 나무가 좋은 과실을 낸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강조하여 선언하고 있다.
 
● 육신에 있는자란 무슨 뜻이며 육은 무엇을 할 수 없는가?
 
“육신에 있는 자들(잃어진 죄인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과 대조된 의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8)
 
여기서 단순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 혹은 "기쁘시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주권적인 은혜가 그들을 다시 살리시지 않으면 전적으로 무능력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또한, 요한복음 6장 63절에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육”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그의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자연인으로서 그의 전부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에서
”육“이란 육체 뿐 만이 아닌 정신과 마음, 의지 즉 사람 그 자체를 의미한다.
 
실제 육이 유익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연인(거듭나지 못한 죄인)이 거듭남에 단 한 부분도 기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하나님 한분만이 하실 수 있다.
 
● 가톨릭에서는 어떤 구절을 가지고 자신들이 믿고 있는 이단 사상을 주장하는가?
 
우리가 방금 언급한 것과 충돌되는 것 같아 보이는 성경구절이 있다.
물론 "같이 보인다“라고 표현했고, 실제 이 말씀들이 불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성경의 대부분의 주제에는 말씀의 본래 취지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구절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 하도록
더 무릎 꿇게 하고, 지혜를 구하도록 하기 위해 쓰여진 구절들이다.
 
만일 모든 구절이 단순하고 평이했다면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는"(고전 2:13) 일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을 보면,
“너희가 다 (그리스도를)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신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 말씀을 읽는 독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이 거듭남의 조건이 되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의미한다고 속단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는 없으며,
만일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모든 성경구절들은 모두 무효가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의 가르침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다분히 성급한 추측이다.
이 구절은 전후 문맥으로 볼 때, 구원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결과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구절은 거듭남의 조건이 아닌, 거듭남 후에 나타나는 결과들에 관점을 두고 있다.
이 구절의 구조를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지 독립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를이 되리니" (마 5:44,45)
 
로마 가톨릭과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행위로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심히 이단적인 교리를 증명하는데 사용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절은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마 5:1,2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참 뜻을 잘 이해해야만 한다.
이 말씀은 곧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이같이 한즉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임이 드러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다시 로마서 8장 14절을 읽어보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씀 또한 분명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드러낸다"라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3장 26절은 (전후구절이 보여주고 있듯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드러난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이해할 때,
이 구절과 다른 인용된 구절들이 서로 상충하지 않고
오히려 갈라디아서 3장 26절이 앞서 인용된 구절들을 보완하고 확증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