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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신학은
주와 복음을 위하여
2016. 10. 7. 00:08
[찰스 스펄전 목사는 이미 100년 훨씬 이전에, “재물을 축적하는 것은 반 기독교적이며 거룩하지 않은 행위”라고 모든 기독교권(가장 큰 교회를 포함)에서 설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지구촌에서 가장 큰 교회들에서는 새로운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복음은 “원하는 것을 부르고 요구하라”, “원하는 것에 떠들고 움켜줘라”고 말하는 바로 “건강과 재물”을 강조하는 번영신학이며, 번영복음이다. 번영의 복음은 무엇이라고 명명하든지 간에, 메시지는 동일하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이 육체적으로 건강하며, 물질적으로 풍족하기를 바라며 그리고 개인적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번영 신학의 주창자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기도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요구하기만 하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우스웨스턴침례교신학교 대학원 학감이자 기독교윤리 교수인 존스(David W. Jones)는 바로 이러한 번영신학의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5가지 결정적인 신학적 실수들을 가지고 있기에 위험하다고, 심각하게 경고한다(5 ERRORS OF THE PROSPERITY GOSPEL).]1.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이르는 수단이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창12, 15, 17, 22장)은 번영신학의 신학적 근간으로 왜곡되고 있다. 성경의 많은 내용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를 기록하고 있다고 번영신학의 신학자들은 말하고는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를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언약의 내용을 왜곡시켜, 자신들이 주장하는 ‘건강과 물질’을 얻는 성경적인 기초라고 말한다. 포손(Edward Pousson)은 자신의 책(Spreading the Flame, Zondervan, 1992)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어떻게 번영신학에 적용되는지를 잘 묘사한다: “크리스천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이며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축복을 이어 받을 적법적인 계승자들이다…이러한 아브라함을 통한 상속은 바로 물질적 풍요라는 개념으로 열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번영신학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주된 목적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물질적으로 축복하셨다는 것이다. 이미 코펠랜드(Kenneth Copeland)는 1974년, “번영의 법들(The Laws of Properity)”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이 이미 체결되었기에 번영은 바로 동 언약의 해당 조항이다.따라서 당신은 번영이 바로 지금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번영신학은 이러한 주장을 보충하기 위해서 갈 3: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을 인용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14절 후반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철저하게 생략되고 무시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구원을 통한 영적 축복을 상기시켰지, 부를 이루는 물질적 축복을 말하지 않았다.2. 예수의 속죄는 물질적 빈곤의 “죄”까지도 확장된다.신학저널(Bibliotheca Sacra)에서 달라스신학교의 켄 사르레스(K Sarles)는 어떻게 해서 정통의 속죄론이 번영신학의 육체적 치유와 재정적 풍요에까지도 남용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는 코펠랜드의 신학적 명제를 정확하게 짚어냄으로 풀어간다. “크리스천 삶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께서 갈보리에서 예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 병듬, 질병, 슬픔, 그리고 빈곤까지도 다 짊어지셨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2가지 왜곡이 일어나게 된다. 1) 번영신학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삶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오해를 하게 된다 실례로, 번영신학의 전도자 아반지니(John Avazini)는 TBN 프로그램에서 “예수는 “근사한 집”, “대궐 같은 집”을 가졌고, “많은 돈들을 세며” 심지어는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명품 옷을 입고 있었다”라고 선포했다. 이처럼 예수의 삶에 대한 왜곡은 자동적으로 예수의 죽음에 대한 또 다른 탈선을 낳게 한다. 2) 따라서 속죄론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어 고린도후서 8장 9절 내용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냥 건성으로 이 말씀을 읽다 보면, 바울 사도가 물질적 부요를 가르친다고 보기가 쉽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인간이 구주를 위해 섬기기 위해서 반드시 자신을 비워야 한다는 점이다. 14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다시 한번 이 내용을 확증한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3. 크리스천들은 자선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주고 베풀어야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번영신학의 여러 특성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자선, 즉 주는 것에 인색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번영은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파워를 사용하는 능력”이라고까지 한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주는 것에 대한 강조는 단순한 박애에 불과하다. 결국 로버트 틸톤(R. Tilton)같은 번영복음 전도자는 이를 “보상의 법”이라고까지 말한다. 틸톤에 따르면, 마가복음 10장 30절(“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에 근거해, ‘크리스천들은 타인들에게 자선을 반드시 베풀면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신다, 따라서 자선과 보상이 계속 반복되는 순환들이 이루어지게 되고, 결국 끝을 알 수 없는 물질의 번영이 따르게 된다’는 논리다. 코펠랜드의 아내 글로리아는 한술 더 떠서, 구체적으로 ‘보상의 법’을 말해준다. “10달러를 주면 1,000달러를 받게 되고, 1,000달러를 주면 10,000달러를 받게 되며… 분명히 마가복음 10장 30절은 이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복음이다.” 번영신학에서의 “자선”은 따라서 분명하게 잘못된 동기로부터 시작된다. 도박에서 판을 늘리기 위해서 돈을 더 걸듯이, 많이 주면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눅6:35)라고 말씀하셨지만, 번영신학은 주면 더 큰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친다.4. 믿음은 번영으로 이르게 하는 자기 발생 영적 힘이다정통 기독교는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신뢰를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번영 복음의 교사들은 전혀 다른 믿음을 가르친다. “믿음은 영적 힘이자 영적 에너지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의 힘은 영적 법칙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번영을 믿는 자에게 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믿음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얻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번영신학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 중심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잘못된 영적 힘으로 발전되며, 이 힘이 하나님에게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의신득의”는 사라지고, 믿음은 오직 물질적 축복만을 얻는 요소로만 남는다.5.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번영을 허락하게 만드는 수단이다.번영신학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4:2b)라는 말씀은 종종 인용된다. 이들이 말하는 기도는 한마디로,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러(Creflo Dollar)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우리가 기도한 것들을 얻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들을 거부하실 아무런 이유가 없으시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으로서 결과를 얻는 열쇠이다.” 물론 개인적인 축복을 얻기 위한 기도들을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번영 복음은 기도를 마치 하나님께서 기도의 내용들을 허락하시도록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너무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세게 기도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간구를 들어주시게 된다는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도의 주체가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뀌어져 있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주인공이 아니라 달라는 인간이 주역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번영신학은 철저하게 기도에 대한 야고보서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무시한다는 점이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4:3).” 하나님께서는 이기적인 기도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는 내용들에 대해서는 응답하지 않으신다.분명하게도, 우리의 모든 간구들은 하나님께 알려줘야 한다(“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4:6). 그러나 번영 복음이 말하는 기도는 인간의 욕망에 너무 강조를 두어,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과는 전혀 동떨어진 이기적이고, 수박 겉을 핥는 기도에 불과하다. 또 인간의 욕망에 강조를 두게 되면 하나님마저도 조종할 수 있게 되는 아주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결론으로,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번영신학은 근본적으로 왜곡돼 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잘못돼있기에 잘못된 복음을 말하고 있다. 만약에 번영신학이 참되다면, 은혜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고, 하나님은 전혀 우리와 관계가 없어지며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이 모든 것들에 대한 척도가 된다.번영신학은 아브라함 언약, 속죄, 자선, 믿음 그리고 기도를 말하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단순한 “거래”로 아주 축소시켜 버렸다. 1990년 신학자 제임스 고프(James Goff)는 크리스처니투데이 기고에서 분명하게 언약에서 거래로 왜곡, 축소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은 결국에는 ‘우주적 사환/급사’로 전락돼, 당신의 피조물들의 요구와 필요에만 참여하신다”. 번영신학은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부적절하고 비성경적으로 완전히 변형시켜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