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월터 모벌리의 「예언과 분별」
[서평] 월터 모벌리의 「예언과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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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과 분별(Prophecy and Discernment)
월터 모벌리 | 새물결플러스 | 468쪽 | 22,000원
한국교회 현장에는 자칭 예언자들이 넘쳐난다. 기실 한국교회에서 통용되는 예언의 정의와 개념은 "미래를 알아내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이 경우 예언은 점치는 것과 동일한 성질을 띨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럴 때 소위 예언자와 예언을 받는 사람 사이에는 신적 비밀을 인지한 사례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상업적 관계), 이런 행위가 반복될 때 양자 사이에는 심리적 종속과 권력관계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예언이 미래를 맞추는 것이 된다면 그 예언의 진정성에 대한 판별 기준은 누가 얼마나 신통하냐, 용하냐로 판가름 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예언은 미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올곧게 대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예언의 특성은 신통함에 있지 않고 신실함에 뿌리 내린다.
누가 진정한 예언자인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에 철두철미 신실한 사람이 진정한 예언자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참 예언이다.
구약신학자 모벌리는 성경적 예언의 참된 분별 기준을 정립하기 위해 성경 전체에 걸쳐 다섯 명의 대표적 인물과 관계된 예언 현상을 분석한다. 그는 먼저 예언의 판별 기준에 대한 모범으로 예레미야를 제시하며, 이어서 미가야, 엘리사(발람), 요한, 바울이 말하는 예언 현상을 면밀히 주해한다. 모벌리에 따르면, 예언이란 결국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성품이 인간의 언어를 통해 중계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위임하신 예언적 말은 철저하게 그분의 본질과 속성을 반영하고 투사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서 예언의 진정성 여부와 관련해서 등장하는 전문 용어인 "야웨의 회의"에 들어감이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본질과 속성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예언이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벌리는 사도 요한에게서는 타자를 위한 사랑이, 바울에게서는 타자를 위한 자기 비움과 희생의 행위가 참된 예언의 기준이었다고 말한다.
곳곳에서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은사를 경험했다고 하면서 각종 예언을 남발하지만 실제로는 윤리가 실종된 무속적 점 개념에 묶여 있는 한국교회 성령 운동의 현실에서, 모벌리의 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자들의 성품과 윤리와 삶 자체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적 특성과 얼마나 신실하게 일치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왜곡된 성령운동에 큰 경종과 함께 단비가 될 것이다. 목차
서문
역자 서문
약어
1장 예언은 무엇이며 예언의 유효성은 확인될 수 있는가?
2장 예레미야- 분별 기준을 정립하다
3장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진정성과 분별의 대가
4장 엘리사와 발람- 분별 능력을 주심과 주시지 않음
5장 요한- 분별의 열쇠로서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사랑
6장 바울- 십자가를 본받는 삶과 진정한 사도를 분별함
7장 오늘날의 예언과 분별
R. W. L. 모벌리
저서로는 [예언과 분별](새물결플러스), [구약신학](Old Testament Theology), [창세기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Book of Genesis), [성경, 신학, 신앙: 아브라함과 예수 연구](The Bible, Theology, and Faith: A Study of Abraham and Jesus) 등이 있다.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할까요? 이 점에 대해 논하기 전에, 일단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예언’의 뜻을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언’하면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사용하는 예언은 한자로 미리 ‘예(豫)’를 사용한 예언(豫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맡을 ‘예(預)’를 사용한 예언(預言)입니다.
한자로 번역되어 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말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의 저자인 월터 모벌리(R.W.L.Moberly)도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로 사용된 단어 ‘나비(navi)’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비(navi)는 본질상 하나님 편에서 말하는 사람이요, 남성 혹은 여성 대언자(spokesman or spokeswoman)다. … 하나님 편에서 말한다는 개념은 자연스럽게 이 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상관개념과 긴밀히 연결된다(3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은 ‘앞일’에 대해 말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말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뤄질 일을 말하는 예언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론적으로 정해진 미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뤄질 ‘하나님의 심판’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미래에 이뤄질 일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의미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예언’ 자체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예언(자)적 선포’라고 해야 할지는 여전히 나눠야 할 부분들이 있겠지만, 본 지면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자가 본서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예언’에 대한 ‘분별’입니다. 예언을 하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 ‘말’(이 말은 인간이 인지 가능한 인간의 것)을 하고 있는데, 그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 ‘예언’을 ‘하나님 말씀(뜻)’으로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물론 오늘날 성경 독자들은 성경 속 예언자들의 말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참 예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예언’을 들었던 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분별했겠으며, 나아가 오늘날에도 ‘예언’이 유효하거나 혹은 ‘예언(자)적 선포’가 실행될 때 그 말을 듣는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분별 기준을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말씀 속에서 찾아 제시합니다.
저자는 예레미야의 경우, 특별히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구도 속의 분별(2장과 3장 초반), 그리고 미가야와 시드기야의 구도(3장), 엘리사와 발람의 경우(4장), 요한의 진술과 바울의 진술(5, 6장)을 통해 우리가 참 예언과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자는 예언을 행하는 예언자들의 삶의 모습과 태도에 그 기준을 둡니다. 즉 예언자의 도덕적 삶의 모습이 그 예언에 대한 진정성을 뒷받침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덕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점과, 도덕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점을 또한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 삶’과 ‘도덕주의’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무능력함과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구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도구로 사용될 인간을 부르실 때, 그의 도덕적 상태를 보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춰,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의 도덕적 기준을 보고서가 아니고 은혜로 부르셨으며 그 은혜 안에서 자신의 말을 대언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의 도덕적인 삶을 발견하고 그 삶 속에서 그가 말하는 것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인위적이지 않은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가?”
그러나 저자는 예언자의 도덕적 삶이 무엇으로 나타나는지(특히 예레미야와 요한)를 말해 줍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거짓 예언자’에 대한 분별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분별’의 기준을 발견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책은 ‘예언자’에 대한 분별을 말하고 있지만, 책을 읽는 저는 목회자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는 듯 보이는 이 시대 속에, 그리고 목회자의 불의와 부정함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분위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은 삶의 신실성입니다. ‘도덕주의’로 치환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신실성입니다. 이 신실성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삶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저자는 제시합니다. 이 결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확인 가능한 결과를 말할 수도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목표, 그가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결과를 말하기도 합니다.
대중(회중) 앞에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 드러나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한 결과적 실패가 공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 필자가 윗 문단에서 밝힌 ‘개인적 기준’은 바로 ‘탐욕·탐심’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3장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종교 지도자들의 과오 중 하나는 신적 권위를 힘입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말’이 일종의 ‘권력’이 될 수도 있는 시대 속에,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가 ‘예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예언적 측면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1차로 설교자들은 설교 행위 그 자체에 권위를 둘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먼저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1차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 이뤄지는 것이라 봅니다. 이는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일에 그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방송(인터넷) 설교에 대해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많은 설교가 넘처나고 있는 ‘설교 홍수의 시대’ 속에, 예언을 사칭한 여러 말들이 넘처나는 시대 속에, 우리는 그 참과 거짓의 분별을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모벌리의 <예언과 분별>은, 이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분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이진용 목사(기독교대한성결교회).
책 속으로
고린도후서 4:12에서는 바울이 사도의 진정성을 분별하는 방법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을 대언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로 진정성을 요구하면서, 예언자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도덕적 실패를 꼽았던 구약성경의 독특한 강조점을 그대로 계승한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예수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 신실함을 다하신 것을 분별의 열쇠로 삼음으로써 구약성경에서 이어받은 도덕적 관심사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십자가의 형상을 본받는 방식으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 중에 신실함을 보인다는 패턴이 이미 예레미야와 미가야에게도 존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본문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두 사람 모두 죽기까지 신실했다). 따라서 예수가 걸어가신 길은 이미 존재하던 길에 더 큰 힘을 실어준다.마태도 유사하게, 예수가 이스라엘이 이미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폐하지 않고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한다.
“예언자는 신비한 체험을 자신의 인성 속으로 흡수하여 인간의 이해와 평가 방법을 통해 걸러낸 다음, 신성이 아닌 사람의 언어 형태로 표현한다”라는 맥케인의 주장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즉 예언자의 말의 형태를 “신이 아닌 사람의 말”로 규정하는 것이 매우 불완전하며, 이처럼 신의 언어와 사람의 언어를 분리하는 것 자체가 예언자의 비인간화와 관련된 난점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예언자의 말의 형태도 사람의 말로서 이스라엘과 다른 여타 지역에서 쓰는 말과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언자의 말이 진정으로 인간의 말이 되는 때는 역시 그 말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반응한 말일 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과 말을 위협하는 분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의 삶과 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닫지 못한다면(그렇게 되게 하시는 과정이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고 파괴한다 할지라도), 계시와 은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모호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분별 행위는 그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이기심이 자만이나 부패의 형태로 널리 퍼져 있을 때는 맞서 싸우고 도전해야 할 것들이 많다. 하지만 긍정해야 할 것도 많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의 기준과 다른 기준을 토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성경적 맥락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도하신 것이라고 증언하는 특질들을 보여줄 때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종종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일 수 있다. 이 문제에는 인정하고 연구하고 거부해야 할 것들이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모습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훌륭한 직관과 행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받고 부인되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교회가 도전할 과제이건만, 교회는 이 도전에 부응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중요한 이유는, 교회 자신의 직관과 실천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보다 그리스도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실체를 드러내는 말과 행위를 인식하고 긍정하는 일은, 비록 그 행위자 자신이 자기 말과 행위를 달리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비판적으로 분별하라고 명령받은 영역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살펴본 본문 중 진정한 예언자를 전통적 의미의 “승자”로 묘사한 본문이 거의 없다는 것이 놀랍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동시대인들 중에서 거의 열매를 맺지 못했으며, 이는 예레미야 자신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그가 “민족과 왕국들 위에 세우심을 받은 것”과 자신이 다른 사람의 손에 비참한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 사이에는 첨예한 긴장이 존재한다. 미가야도 주목받지 못했으며 옥사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바울이 자신의 사역과 여행을 설명한 내용도 영광이나 “승리”를 내세운 과거 이야기들과는 정반대 모습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삶을 주를 향한 신실함으로 기쁘게 받아들인다. 바울의 주님도 삶과 사역에서 잔인한 배신과 고문을 당하고 치욕스러운 공개 처형으로 최후를 맞았다. 정경에 포함된 목소리들은 진리를 위해 고난 당한 이들의 목소리다.
예언의 진정성 분별의 문제는, 이를 깨닫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살아 있는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 즉 “나는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가? 혹은 신뢰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의 문제를, 특별히 성경의 예언자(사도)를 부각시켜 강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사귀는 친구, 우리가 선택하는 인생의 반려자, 우리가 고르는 직장, 우리가 주목하는 광고, 우리가 돈을 쓰는 방식, 우리가 삶에서 우선시하는 가치, 우리가 절망과 고난을 헤쳐 나가는 방식, 우리가 인생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영역에서 신뢰할 만한 근거들에 올바로 주목하지 못하면 고통과 좌절과 방황과 상실이 이어지고 정녕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패턴과 일치하는 인간의 진정성이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뜻을 분별할 때 행하는 역할을 다룬 논증은 인간의 기본 관심사를 망라하며 이것을 부각시키고 있다.이는 성경의 계시와 그 계시에 뿌리박은 신앙이 알려주는 하나님이 사람이 원래 되어야 할 존재가 될 수 있게 해주시는 실재이시기 때문이다.
https://youtu.be/0wgVzSt4a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