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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 /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 하는가? 中에서 / 존 오웬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 /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 하는가? 中에서 / 존 오웬


복음적 거룩이 유지되려면 영적 전쟁에 끊임없이 가담해야 한다.
마귀와 육 그리고 이 세상은 복음의 참 거룩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것(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우리를 내몰려고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야만 한다(벧전 5:8,9 참조).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2,13 참조).
우리는 영혼을 대항해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로부터 “도망쳐야”한다(벧전 2:11 참조).
그리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아야”한다(요일 2:15).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이기되 믿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요일 5:4,5 참조).
하나님은 우리가 그저 종교적 의무 중 몇 가지나 행하고 몇 가지 특별한 죄나 피하는 식으로 사는 것을 용납지 않으실 것이다. 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자갈물리지 않은 정욕들을 죽이는 것, 마귀를 대적하는 것,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도망하고 세상을 사랑 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은 복음의 의무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지켜야 할 것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 가나안 국경에 도착했을 때 열 정탐꾼의 보고를 전해 듣고 낙심하여 용기를 잃었듯이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싸워야 하는 이 영적 전쟁에 대해 듣고는 낙심하여 용기를 잃는다(민 13:32; 막 12:34 참조).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그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적 거인들만 볼 뿐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는 보지 못한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전쟁을 치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생하지도 않고 거룩의 적들과 싸울 영적 힘도 전혀 없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쓴다. 그들은 육신의 힘만 가지고도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육신은 곧 지치고 말 것이요, 어떤 의무들을 행하지 못하는 데 대해 구구한 변명들을 늘어놓기 시작할 것이다. 육신에게 오는 대부분의 지원은 회개치 비 영적 마음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의무를 행하다가 하나씩 하나씩 생략하는 것들이 생기게 되고 마침내는 아예 다 잊어버릴 것이다. 계속해서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는 의무는 등한시될 것이다(고전 9:27 참조).

참 신자라면 이처럼 의무를 태만히 한 데 대해 겸비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와 이전의 열심을 다시 낼 것이다(시 119:176 참조). 그러나 위선자들은 복음의 의무들을 태만히 한 데 대해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내주하던 죄가 거룩과 대항해 싸워 종종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내주하던 죄는 이전처럼 계속 육을 지배하려 들 것이고 결국 그 당사자의 마음은 지치게 될 것이다. 이 때 위선자는 자기 안에 거하는 죄에 대해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러나 신자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도록”(롬 6:14)하라는 약속을 붙잡는다.

우리는 오직 성령의 은혜와 도우심을 통해서만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한 상태에 안전히 거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참 길을 모른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하며, 곧 육신이 만들어 내는 거룩함에 만족해 버린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그의 영 없이 이루어지거나 존재하는 그런 거룩함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더군다나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거룩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요 15:5 참조).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의 의를 세우려 애쓰듯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힘으로 계속 사는 방법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전혀 거룩이 아닌데도 말이다.
회개치 아니한 사람은 진정한 복음적 회개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할 수도 없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행 5:31, 11:18; 딤후 2:25).
참 회개라는 이 은혜 때문에 신자들은 그 모든 실패, 약함 그리고 죄를 다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에 이르는 문이요 참 신자들이 계속해서 거룩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지켜 주는 보호자이다. 신자들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함을 깨닫고 자신들이 행하는 최고의 선도 그분의 영광에 견주어 보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겸손, 바로 그 겸손이 신자들로 하여금 거룩을 추구하고 거룩 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참 회개의 단맛과 유익함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 회개의 은혜를 체험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영적 위로를 맛보지 못한 사람, 회개란 단지 율법 및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만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매일매일 회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적 거룩은 복음의 모든 의무에 끊임없이 습관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며 마음이나 육체에서 나오는 어떠한 정욕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야만 한다.
육체에서 그 정욕을 채울 기회를 제공해서는 절대 안 된다(롬 13:14 참조). 이 말들은 복음적 용어들이다.
복음의 한 가지 의무라도 등한시되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죄라도 그것에 계속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우리의 약함 때문에 매일매일 저지르게 되는 죄들을 용서하고 제거해 준다(벧전 4:1,2 참조).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그중 한 가지 죄라도 마음에 품고 간직하며 애지중지하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죄를 지으며 사는 생활이란 복음적 순종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일이다(요일 3:6-9 참조).

새 언약 안에서 요구되는 완전은 곧 새로워진 생명 안에서 거짓 없는 정직으로 성실하게 육이 아닌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창 17:1; 요일 3:7-10 참조).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죄를 보되 복음이 보듯 볼 수 없으며 복음이 죄라고 선언하는 것들을 죄나 악으로 판단할 수도 없다. 이러한 어둠과 무지 아래서 인간은 그 마음에 온갖 거짓된 정욕들을 품고 키우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속에 남아 있는 죽지 않은 정욕들에 대해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스도께 왔던 그 젊은이는 아마 마음에 있는 재산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지 않았을 것이다. 사울 왕이 찾아갔던 그 신접한 여인은 “심부름 마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그 마귀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매일매일 그 마귀를 즐겁게 해주다 보니 그 마귀는 어느새 그녀의 심부름 마귀가 되었다. 그녀는 마귀가 자기 손안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녀가 그 마귀 손안에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죽지 않은 정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욕도 자꾸 행하면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되어 버린다. 사람은 자기가 그 정욕을 지배하고 있으며 원할 때는 언제든지 그 정욕을 내어 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정욕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의 명령에 담겨 있는 그 내적이며 영적인 깊이를 무시하려 든다. 교육을 받아 미신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진데다 통이 커진 인간의 마음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자그마한 죄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보았자 설교자들의 관심거리나 증진시켜 줄 뿐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죄의 사악함과 오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실수를 좀 저질렀다고 해서 그렇게 괴로워해야만 하는가? 라고 질문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의 율법의 거룩함에 대해 전혀 모르면 이렇게 쉽게 그들의 타락한 마음에 의해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교만, 야망, 탐심, 세상에 대한 사랑, 불결, 탐욕, 자랑, 게으름, 이 모든 것 때문에 인간은 이런 죄 저런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납도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축복이나 도우심을 기대할 근거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람이 한 가지 죄만 지어도 율법 전체를 어긴 것이라 했다(약 2:10 참조).
시편 기자는 만약 자기가 마음에 불의를 품으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다(시 66:18 참조). 한 가지 죄에 탐닉하게 되면 곧 다른 죄들을 더 짓게 될 가망성이 있다.
사람이 한 가지 죄에 탐닉하게 되면 그 영혼은 죄에 대항하는데 사용해야 할 방편들에서 멀어져 한눈을 판다. 그 방편들을 이용해서 다른 모든 죄들에 대항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또 복음의 거룩으로부터도 돌아선다. 왜냐하면 그 은혜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적 철학자들은 자기들이 덕을 사랑한다고 선포했다. 왜냐하면 덕을 사랑해야 자기 자신에게 영예와 영광 및 명성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런 덕성들은 사람의 칭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종교적 행위를 했다. 그들이 행한 모든 종교적 행위의 동기는 곧 자기 사랑과 인간의 칭찬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겸손한 자, 마음이 청결하고 애통하며 남을 긍휼이 여기고 화평케 하는자, 의에 굶주린 자, 그 영이 단순하고 정직한 자, 어떤 해든 다 견뎌내며 해한 자들을 용서하는 자,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자, 세상을 경멸하고 죄짓는 것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 이런 자들은 인간의 칭찬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기뻐하신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보화들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유약하고 미신적이며 어리석고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복음의 거룩은 결국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죽을 수밖에 없는 눈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마음을 볼 수 없으며 또 그런 일에 관심을 갖는 자도 거의 없다. 따라서 복음이 요구하는 덕성들은 세상이 높이 평가하는 그런 덕목들에 밀려 푸대접을 받게 마련이다.

큰 배도가 시작되고 교회들이 복음의 능력과 순결로부터 돌아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눈에 확 띄는 경건과 자선을 행하도록 격려함으로써 복음의 주된 은혜들(가령, 중생의 필요성이라든가 영적 생활이라는 천국 원리에 대한 필요성과 같은 것들)을 등한히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더러워졌든, 정욕이 죽지 않았든, 마음이 교만과 완고함으로 가득 차 있든, 영혼이 영적 천상의 은혜를 무시하든,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보여 져서 칭찬을 받게 될 이러한 외적으로 영광스러운 일들이 틀림없이 그들을 불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위선적 가면을 책망하며 속사람만 은혜를 받으면 된다고 고집하는 가운데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인류에게는 선이 되는 복음의 외적 의무들을 등한히 하는 일이 없게 되도록 우리 모두 깨어 있자.

복음이 요구하는 참 거룩은 우리의 속사람을 정결케 할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엡 2:10) 선행들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함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에 기꺼이 순종하는 새 성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볼 수”있을 때에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고후 3:18). 우리는 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시지”(고후 4:6) 않는 한 “그 영광을 뵈올 수” 없다.

이래서 진리를 공공연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과 삶 속에서 복음의 가르침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는 것이다.